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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이 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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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이아브라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4-25 20:38 조회 Read3,854회 댓글 Reply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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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내 사라에게

그 무슨 곡조로도 부를 수 없는 것은
고귀한 희생이 퇴색할까 함이요. 
아름다운 어조로도 읊조릴 수 없는 것은
미망(未忘)이 가슴을 누르기 때문이요.
한루(恨淚)를 찌어 피울 수도 없는 것은
세월이 내 눈물을 앗아갔기 때문입니다.

인정머리 없는 서릿바람 앞에
들레기는커녕 외마디 비명조차 없이
속으로 삭이다, 삭이다 오그라든 심장.
비바람에 녹슬고 멍든 물받이가 되어
핏빛 사랑을 흘려보낸 그 세월, 세월들...

산촌(山村) 곁 자락에 흩뿌려진 무명초
고혹적인 빛깔도, 요란한 향기도 없이
인적 드문 골짜기를 운명처럼 지키면서
눈길은 먼데 하늘 끝 가생이에 두고
무심한 벌판을 멍청하게도 지키던 인종(忍從).
그 곁으로 몇 바람이 스쳐 갔는가?

테를 둘러 더욱 가여운 금간 질화로
바각거리는 육신이 한(恨)스럽기만 한데
다독인 재속에 남은 가녀린 불씨는 
뎁히는 재주도, 불붙는 열기도 없지마는
꺼진 듯, 숨죽이며
여전히 냉(冷) 고래를 지켜온 정염(情炎).
찬 서리 몇 겹이나 할퀴고 갔는가?

어김없이 돌아오는 아침
매일 같이 되풀이 되는 하루
식탁 위에 가지런히 펴진 성경,
마시다만 커피 잔과 접시,
무슨 기원(祈願)인가를 긁적인 노트 장이 있고
언제나 그러하듯,
당신의 따스한 미소가 거기 또 감돌고.....
헌데,
서둘러 던지고 간 구겨진 슬리퍼엔
고된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고,
내 마음에는 알 수 없는 분이 일어
메어오는 슬픔으로 아픈데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소리에
아침 햇살을 마주보니 눈이 부시다.

당신, 이사라!
내 인생의 구비마다, 질곡마다
이정표처럼 무표정한 파숫꾼으로
세파(世波)에 휘둘리기, 벌써 30년.
그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도
한결같이 고요한 버팀목으로 
잔인한 인간사에 바랜 채, 어언 초로(初老).

아!
철없이 치달려온 내 무지를 어찌하며,
무심한 세월을 탓한 듯 무엇하랴?

그러나 이제,
노을처럼 동터오는 당신의 새벽을 위해

여기,
나의 남은 한 자락을 무릅으로 드립니다.

그 날,
그 품에 깃을 접고,
그 포구에 닻을 드리우면,
그 모든 눈물을 씻기실 때까지.

주후 2005년 7월 26일 새벽에
무익한 남편이

위의 글은 2005년에 우리의 결혼 30주년을 맞아 쓴 것인데,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그저 부끄러운 잡문에 불과합니다.
14년이 지난 지금 찬찬히 다시 보니 형편없는 글을 공연히 어려운 말과 미사여구로 포장한 내면이 들킨듯 게면쩍군요.

이제 아내의 나이 70이 되고, 나 또한 75세를 맞고 보니 조금은 철이들고 정직해진듯합니다.
뭔가 길게 쓴다는 것 자체가 아내의 사랑과 희생에 덧칠을 하는 유치한 포장 같아서 단순한 고백이 나올 뿐이네요. 
주님 뵈올날을 지척에 둔 나이인지라 그러한가 봅니다. 


나는 그림 당신은 화판
나는 쌀밥 당신은 밥솟
나는 나무 당신은 뿌리
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후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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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Reply List

관리자1님의 댓글

관리자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Date

목사님... 이것은  글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형체화 된 노래와 같습니다~ 풍경화 같습니다.
두 분처럼 좁은길 걸으며 변함없이 점점 더 사랑하는 부부가 되도록 닮도록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황재임님의 댓글

황재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Date

오.... 목사님의 마음이 어려운 미사어구에서 구구절절이, 하지만 그 깊이가 느껴져서 감동입니다 .
사라 사모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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