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얻게하는 믿음 (요한복음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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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Don Kim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10-16 10:06 조회 Read700회 댓글 Reply0건관련링크
본문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은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며 그 기록한 목적을 “믿음과 생명” 두 가지로 나타냅니다.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과,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합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마치 아기가 부모로부터 생명을 얻어 태어나듯 생명을 갖는다는 말이며, 어떠한 생명을 갖는다는 말은 그 생명의 본질을 산다는 것입니다. 개가 개의 생명을 갖고 태어나 개처럼 살고 인간은 인간의 생명을 갖고 태어나 인간처럼 살고,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생명을 갖고 거듭(다시) 태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얻는 동시에 그의 이름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말씀입니다. 엄청난 특혜요 충격적인 현상/현실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결합하여 사는 것입니다. 두 인격체가 한 몸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금방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갓 태어난 어린 아기가 먹고 싸고 울며 웃으며 기다가 걷고 넘어지고 쓰러지며 성장하여 인간답게 살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이러한 성장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처럼 예수 믿고 나니 사는 것이 평화롭고 행복한 천국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 혼돈, 분쟁, 투쟁, 고민, 고통이 더 많아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르치고 명하시고 지향하신 삶을 산다는 것이 좋기는 한데 그만큼의 고민, 고생, 고난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우리 자신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감히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용서하신다니까, 병이 낫는다니까, 부자가 된다니까, 복을 받는다니까, 천국 간다니까, “믿습니다” 하고 신앙의 길을 나섰는데 그 길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좁고 험하고 외로울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니 조금 가다 실망하고 변명하고 떠나고 심지어는 베드로처럼 저주하며 부인까지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 죽고 못 사는 연인들도 결혼해 같이 사는 것이 쉽지 않은데 죄 가운데 태어나 죄악 속에서 살던 우리가 거룩한 예수의 생명과 같이 살게 되었으니, 처음에는 고맙고 즐겁고 신기하고 기대가 컸지만, 점점 두 생명이 부딪치고 갈등하다 결국 같이 지내는 것이 고역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라면 이혼한다든지 서로 각방을 쓰면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물이 온몸에 스며들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푹 적시고 있기에 나누어질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하는 오동낭에 걸려 혹시나 하며 교회를 오가며 행복한 척하며 천국 가는 날만 기다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아예 신앙인의 삶을 멈춤과 동시에 신앙 성장과 직결된 예배, 교제, 말씀, 기도, 섬김, 희생 등등과는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며 결국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영적인 삶(영생)이 육신적(본능적)인 삶에 눌려 찍소리 못하고 살든지 아니면 매일 눈뜨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싸우다 지쳐 포기하든지.
왜 이러한 현상이 파다한지 한 마디로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우리 신앙생활, 즉 영생(eternal life)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인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첫째는 기복신앙입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는데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받고, 병도 낫고, 복도 받고, 부자도 되고, 천국에도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 이루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런 것을 일생에 한두 가지 혹은 한두 번 체험할 수 있으나 항상 일어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입니다. 복권 당첨처럼 말입니다. 더군다나 생각지 못한 혼란, 혼돈, 고뇌, 고통, 고생, 분쟁, 투쟁을 겪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도 믿기 전보다 더 많이 말입니다.
둘째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을 지키는데 올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율법을 따르고 가르치고 지키는 것은 우리 인생과 사회에 좋은 것이나 이것이 영생의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인생을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수단과 방법이자 도구이지 영생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사는 집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도구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좋은 동네의 크고 비싼 집을 갖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양 거기에 올인한다면 사는 것이 지는 전쟁 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겨도 지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그럴듯합니다. 왜냐? 선한 하나님이 선한 삶을 살도록 주신 선한 법도를 잘 지키며 살자는 선한“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다른 주의나 법도는 감히 비교도 안 되는 거룩(Holy)한 하나님의 법도를 잘 지키며 살자는데 누가 감히 반대하며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에 힘입어 사는 것이지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도 없을뿐더러 율법을 다 지킨다 해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느라 투쟁하다 보면 남는 것은 고생, 고통, 고뇌와 번뇌로 이어지는데 그렇다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열심인 신앙인이 울상짓고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래 봬도 제가 목사인데 말입니다. :)
사도 요한은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며 그 기록한 목적을 “믿음과 생명” 두 가지로 나타냅니다.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과,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합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마치 아기가 부모로부터 생명을 얻어 태어나듯 생명을 갖는다는 말이며, 어떠한 생명을 갖는다는 말은 그 생명의 본질을 산다는 것입니다. 개가 개의 생명을 갖고 태어나 개처럼 살고 인간은 인간의 생명을 갖고 태어나 인간처럼 살고,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생명을 갖고 거듭(다시) 태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얻는 동시에 그의 이름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말씀입니다. 엄청난 특혜요 충격적인 현상/현실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결합하여 사는 것입니다. 두 인격체가 한 몸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금방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갓 태어난 어린 아기가 먹고 싸고 울며 웃으며 기다가 걷고 넘어지고 쓰러지며 성장하여 인간답게 살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이러한 성장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처럼 예수 믿고 나니 사는 것이 평화롭고 행복한 천국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 혼돈, 분쟁, 투쟁, 고민, 고통이 더 많아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르치고 명하시고 지향하신 삶을 산다는 것이 좋기는 한데 그만큼의 고민, 고생, 고난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우리 자신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감히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용서하신다니까, 병이 낫는다니까, 부자가 된다니까, 복을 받는다니까, 천국 간다니까, “믿습니다” 하고 신앙의 길을 나섰는데 그 길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좁고 험하고 외로울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니 조금 가다 실망하고 변명하고 떠나고 심지어는 베드로처럼 저주하며 부인까지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 죽고 못 사는 연인들도 결혼해 같이 사는 것이 쉽지 않은데 죄 가운데 태어나 죄악 속에서 살던 우리가 거룩한 예수의 생명과 같이 살게 되었으니, 처음에는 고맙고 즐겁고 신기하고 기대가 컸지만, 점점 두 생명이 부딪치고 갈등하다 결국 같이 지내는 것이 고역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라면 이혼한다든지 서로 각방을 쓰면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물이 온몸에 스며들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푹 적시고 있기에 나누어질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하는 오동낭에 걸려 혹시나 하며 교회를 오가며 행복한 척하며 천국 가는 날만 기다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아예 신앙인의 삶을 멈춤과 동시에 신앙 성장과 직결된 예배, 교제, 말씀, 기도, 섬김, 희생 등등과는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며 결국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영적인 삶(영생)이 육신적(본능적)인 삶에 눌려 찍소리 못하고 살든지 아니면 매일 눈뜨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싸우다 지쳐 포기하든지.
왜 이러한 현상이 파다한지 한 마디로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우리 신앙생활, 즉 영생(eternal life)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인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첫째는 기복신앙입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는데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받고, 병도 낫고, 복도 받고, 부자도 되고, 천국에도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 이루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런 것을 일생에 한두 가지 혹은 한두 번 체험할 수 있으나 항상 일어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입니다. 복권 당첨처럼 말입니다. 더군다나 생각지 못한 혼란, 혼돈, 고뇌, 고통, 고생, 분쟁, 투쟁을 겪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도 믿기 전보다 더 많이 말입니다.
둘째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을 지키는데 올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율법을 따르고 가르치고 지키는 것은 우리 인생과 사회에 좋은 것이나 이것이 영생의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인생을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수단과 방법이자 도구이지 영생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사는 집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도구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좋은 동네의 크고 비싼 집을 갖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양 거기에 올인한다면 사는 것이 지는 전쟁 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겨도 지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그럴듯합니다. 왜냐? 선한 하나님이 선한 삶을 살도록 주신 선한 법도를 잘 지키며 살자는 선한“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다른 주의나 법도는 감히 비교도 안 되는 거룩(Holy)한 하나님의 법도를 잘 지키며 살자는데 누가 감히 반대하며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에 힘입어 사는 것이지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도 없을뿐더러 율법을 다 지킨다 해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느라 투쟁하다 보면 남는 것은 고생, 고통, 고뇌와 번뇌로 이어지는데 그렇다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열심인 신앙인이 울상짓고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래 봬도 제가 목사인데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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