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가더니와 믿으니라 (요한복음 4: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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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Don Kim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11-22 08:58 조회 Read87회 댓글 Reply0건관련링크
본문
본문에는 병든 아들을 가졌던 한 왕의 신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어떤 왕인지는 모르지만 왕의 직속 신하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권력과 재력, 능력, 부귀, 영화의 상징 인물입니다. 소위 말해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부러운 것 없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아들이 병 걸려 죽게 된 것입니다. 여러 방면으로 알아도 보고 치료도 했지만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권력, 재력, 능력이 있었지만, 병으로 죽어가는 자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병든 자를 일으키고 눈먼 자를 뜨게 하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병 잘 고치는 이가 지난번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던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는 자신이 사는 가버나움에서 23마일(참고로 마라톤은 26.2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밑져 봤자 본전, 아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예수님을 찾아와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며 애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그리 썩 좋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적을 보지 아니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를 믿고 왔는데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으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급한지라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면서 재촉하였지만,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하면서 그냥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믿고 왔는데 믿지 않는다고 하고 죽어가는데 살아있다고 하고 같이 가자는데 그냥 가라고 하니 뭐가 뭔지 하나도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과 따질 수도 없고, 강제로 연행할 수도 없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아들이 죽어가는 상황에 예수님(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었던 왕의 신하, 우리는 그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그를 나무란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아니하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믿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자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아니하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요한은 이 왕의 신하가 그 말씀을 믿고 갔다고 기록한 것입니다(51절).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이 빗나간(틀린) 것입니까? 이 왕의 신하가 진실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습니까?
성경은 이 왕의 신하가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를 찾아오고 있는 종들을 만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52절). 그가 종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종들이 그를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종들이 그를 찾았는데 때마침 집으로 내려오는 왕의 신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만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질문해야 하는 것은 종들이 왜 집에서 일하다 말고 그를 찾아 나섰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가 살아난 소식을 전하고자 주인을 찾아 나섰겠지요. 그리고 또 만나자마자 왜 왕의 신하는 낫기 시작한 때를 물어보았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와 비교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일곱 시가 바로 예수님이 아이가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 그 시각이었음을 확인하고 “그와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3절)”고 하면서 그 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한가지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분명 51절에 믿고 갔다고 했는데 53절에 그와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51절의 ‘믿고 가더니’는 무엇이고 53절의 ‘믿으니라’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48절에 말씀하신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와 통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믿는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지막 한 가닥 소망을 갖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아이가 살았으니 가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리 믿어지지 않고 믿을 수도 없지만 믿는다고 하며 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강제로 예수님을 끌고 갈 수도 없고 말입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믿는다고 하고 예수님 앞을 나왔지만, 도무지 집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하나의 촛불마저 꺼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없고, 약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식구들을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죽었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곳을 나온 것이 일곱 시, 즉 오후 한 시쯤이었는데 하인들을 만난 시간은 그다음 날. 그럼 오후 한 시부터 그다음 날 하인들을 만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믿고 갔다고 했는데 집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디로 갔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무엇을 믿었을까요?
바로 이때 병든 자를 일으키고 눈먼 자를 뜨게 하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병 잘 고치는 이가 지난번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던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는 자신이 사는 가버나움에서 23마일(참고로 마라톤은 26.2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밑져 봤자 본전, 아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예수님을 찾아와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며 애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그리 썩 좋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적을 보지 아니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를 믿고 왔는데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으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급한지라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면서 재촉하였지만,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하면서 그냥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믿고 왔는데 믿지 않는다고 하고 죽어가는데 살아있다고 하고 같이 가자는데 그냥 가라고 하니 뭐가 뭔지 하나도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과 따질 수도 없고, 강제로 연행할 수도 없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아들이 죽어가는 상황에 예수님(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었던 왕의 신하, 우리는 그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그를 나무란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아니하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믿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자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아니하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요한은 이 왕의 신하가 그 말씀을 믿고 갔다고 기록한 것입니다(51절).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이 빗나간(틀린) 것입니까? 이 왕의 신하가 진실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습니까?
성경은 이 왕의 신하가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를 찾아오고 있는 종들을 만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52절). 그가 종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종들이 그를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종들이 그를 찾았는데 때마침 집으로 내려오는 왕의 신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만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질문해야 하는 것은 종들이 왜 집에서 일하다 말고 그를 찾아 나섰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가 살아난 소식을 전하고자 주인을 찾아 나섰겠지요. 그리고 또 만나자마자 왜 왕의 신하는 낫기 시작한 때를 물어보았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와 비교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일곱 시가 바로 예수님이 아이가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 그 시각이었음을 확인하고 “그와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3절)”고 하면서 그 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한가지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분명 51절에 믿고 갔다고 했는데 53절에 그와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51절의 ‘믿고 가더니’는 무엇이고 53절의 ‘믿으니라’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48절에 말씀하신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와 통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믿는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지막 한 가닥 소망을 갖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아이가 살았으니 가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리 믿어지지 않고 믿을 수도 없지만 믿는다고 하며 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강제로 예수님을 끌고 갈 수도 없고 말입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믿는다고 하고 예수님 앞을 나왔지만, 도무지 집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하나의 촛불마저 꺼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없고, 약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식구들을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죽었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곳을 나온 것이 일곱 시, 즉 오후 한 시쯤이었는데 하인들을 만난 시간은 그다음 날. 그럼 오후 한 시부터 그다음 날 하인들을 만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믿고 갔다고 했는데 집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디로 갔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무엇을 믿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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