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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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Don Kim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11-26 17:58 조회 Read65회 댓글 Reply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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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연못. 이름만 그럴듯하게 자비의 집이라고 칭하였지만, 수많은 병자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이 동하기만 기다리다 죽거나 포기했던 소망의 집이 아닌 허망의 집. 겉으로는 많은 병자들이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도와주는 것 같았던 집이었지만 물이 한번 동하기만 하면 모든 이의 욕심과 이기심과 본색이 드러나는 전쟁의 집. 그러나 어느 곳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던 집. 바로 이 집이 베데스다 연못가요, 우리 세상이요, 우리 교회요, 우리 학교요, 우리 가정입니다. 쉬는 곳이 아니라 무기력한 곳이요, 서로 감싸고 위로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 치고받고 밟으며 올라서야만 하는 곳. 바로 이곳에 유월절 행사 치르기 바쁜 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 38년 된 병자를 주목하여 보신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자. 오직 38년간 병으로 고생한 것으로 유명(?)했던 사람. 그의 병명은 다름 아닌 중풍(paralytic).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연못에 들어가려고 해도 마음대로 못 하던 사람. 또한 연못에 들어가는 경쟁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 없었던 사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누워서 지내던 사람. 살아 있는 것은 불평을 토해내는 입 밖에 없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의 누운 것과 병이 오래된 것을 아시고 그에게 다가간 예수님. 누가 내 앞에 서서 들어오는 빛을 가리냐고 좀 비키라고 하려는 찰나 느닷없는 예수님의 질문, "네가 낫고자 하느냐?" 아니, 보시면 모르는가? 38년 된 병자에게 낫고 싶냐고 물어보시는 예수님. 얼마나 한심한 질문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필요 없거나 한심한 질문을 하시지 않는 분. “네가 진실로 낫고자 하는가?”
38년간의 긴 세월속에 오히려 그 삶이 이제는 그렇게 아프지도, 힘들지도, 어색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2~3년만 지나도 익숙해지는 데 38년간의 무능했던 삶은 그에게 있어서 생존 능력이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불편함도, 고달픔도, 창피함도 없고 그것으로부터 낫고자 하는 원함조차 사라져 버린 이 사람에게는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오래되고 계속된 무기력한 삶, 병적인 삶, 죄 속의 삶 등등에서부터 낫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바로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낫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제아무리 하나님도 어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는 하나님.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안타깝게 질문하시는 예수님, 또한 낫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권세(authority) 있는 말씀(the word)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네, 낫기를 원합니다’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이 병자처럼 할 말이 많습니까? 결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결국 우리 “병”의 해결은 내가 낫고자 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영적 병(spiritual disorder/disease)"은 말입니다.
38년 된 병자,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자. 오직 38년간 병으로 고생한 것으로 유명(?)했던 사람. 그의 병명은 다름 아닌 중풍(paralytic).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연못에 들어가려고 해도 마음대로 못 하던 사람. 또한 연못에 들어가는 경쟁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 없었던 사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누워서 지내던 사람. 살아 있는 것은 불평을 토해내는 입 밖에 없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의 누운 것과 병이 오래된 것을 아시고 그에게 다가간 예수님. 누가 내 앞에 서서 들어오는 빛을 가리냐고 좀 비키라고 하려는 찰나 느닷없는 예수님의 질문, "네가 낫고자 하느냐?" 아니, 보시면 모르는가? 38년 된 병자에게 낫고 싶냐고 물어보시는 예수님. 얼마나 한심한 질문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필요 없거나 한심한 질문을 하시지 않는 분. “네가 진실로 낫고자 하는가?”
38년간의 긴 세월속에 오히려 그 삶이 이제는 그렇게 아프지도, 힘들지도, 어색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2~3년만 지나도 익숙해지는 데 38년간의 무능했던 삶은 그에게 있어서 생존 능력이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불편함도, 고달픔도, 창피함도 없고 그것으로부터 낫고자 하는 원함조차 사라져 버린 이 사람에게는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오래되고 계속된 무기력한 삶, 병적인 삶, 죄 속의 삶 등등에서부터 낫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바로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낫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제아무리 하나님도 어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는 하나님.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안타깝게 질문하시는 예수님, 또한 낫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권세(authority) 있는 말씀(the word)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네, 낫기를 원합니다’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이 병자처럼 할 말이 많습니까? 결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결국 우리 “병”의 해결은 내가 낫고자 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영적 병(spiritual disorder/disease)"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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