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8 주일설교 "가서 즉시 이와 같이 하라 Go and Immediately Do Likewise" > 설교모음 Sermons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설교모음 Sermons

02.28 주일설교 "가서 즉시 이와 같이 하라 Go and Immediately Do Likewise"

페이지 정보

Author 관리자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3-02 10:56 조회 Read1,004회 댓글 Reply1건

본문


ㅇ 제 목 : 가서 즉시 이와 같이 하라 Go and Immediately Do Likewise
ㅇ 설교자 : 이아브라함 목사, Rev. Lee
ㅇ 본 문 : 누가복음 Lk 10:25-37
1. 누가복음 10:25-37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10:25 And behold, a lawyer stood up to put him to the test, saying, “Teach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26 He said 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do you read it?”
27 And he answered,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28 And he said to him, “You have answered correctly; do this, and you will live.”
29 But he, desiring to justify himself, said to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30 Jesus replied, “A man was going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and he fell among robbers, who stripped him and beat him and departed, leaving him half dead.
31 Now by chance a priest was going down that road, and when he saw him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2 So likewise a Levite, when he came to the place and saw him,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3 But a Samaritan, as he journeyed, came to where he was, and when he saw him, he had compassion.
34 He went to him and bound up his wounds, pouring on oil and wine. Then he set him on his own animal and brought him to an inn and took care of him.
35 And the next day he took out two denarii and gave them to the innkeeper, saying, ‘Take care of him, and whatever more you spend, I will repay you when I come back.’
36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proved to be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among the robbers?”
37 He said, “The one who showed him mercy.” And Jesus said to him, “You go, and do likewise.”

2. 누가복음 19:5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19:5 And when Jesus came to the place, he looked up and said to him, “Zacchaeus, hurry and come down, for I must stay at your house today.”

3. 요한복음 4:7
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4:7 A woman from Samaria came to draw water. Jesus said to her, “Give me a drink.”

4. 요한복음 21:12
2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21:12 Jesus said to them, “Come and have breakfast.” Now none of the disciples dared ask him, “Who are you?” They knew it was the Lord.

5. 창세기 18:2-3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18:2 He lifted up his eyes and looked, and behold, three men were standing in front of him. When he saw them, he ran from the tent door to meet them and bowed himself to the earth
3 and said, “O Lord, if I have found favor in your sight, do not pass by your servant.

6. 창세기 19:1-2
19: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2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19:1 The two angels came to Sodom in the evening, and Lot was sitting in the gate of Sodom. When Lot saw them, he rose to meet them and bowed himself with his face to the earth
2 and said, “My lords, please turn aside to your servant's house and spend the night and wash your feet. Then you may rise up early and go on your way.” They said, “No; we will spend the night in the town square.”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Reply List

이아브라함님의 댓글

이아브라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Date

2021년 2월 28일        누가복음 10:25-37      “가서, 즉시 이와 같이 하라.“

방금 전에 보신 것은 우리 네 번째 손주의 백일사진과 동영상입니다. 그의 이름은 Adonirum Lee 입니다. Adonirum은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서 지금 미얀라라고 하는 버마에서 37년동안 목숨바쳐 선교사역을 한 분인데, 아들 내외는 이 아이를 Adoniram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결단과 헌신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손주가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다가 젖을 달라고 앙앙 우는 비데오를 보니 더욱 조금 더 실감이 나더군요. 그런데 백일쯤 되니까 이 어린 것이 제 애비와 소통을 하는 것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과연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통(communication)은 두 개체 간에 공통점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교감하는 것을 말하지요. 이제 앞으로 수개월이 지나면 이 어린 것이 아빠, 엄마, 맘마, 하면서 말로 소통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자라가면서 눈으로, 행동으로, 글로, 소통하면서 부모의 심정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겠지요. 

문명이 발달하면서 지금은 소통하는 방법이 많아졌습니다. 편지, 전화, 카톡, video call, zoom, 등등 소통의 방법은 많이 발달했는데, 세상에는 소외되는 사람들이 도리어 많이 늘어나고 인간관계가 더 소원해 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더구나 지금과 같이 펜데믹으로 거리두기가 의무화 혹은 생활화 되다보니 더욱 소통이 어려워지고 혹시 만난다고 하여도 매스크를 쓰고 있어서 서로 말수도 적어지고 또 표정도 읽기 힘들어서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또한 자주 만나서 나눔을 갖지 못하니까 대화의 내용도 별로 다양하지 못한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서로 소통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식구들 가운데는 지난 한해동안 만나지 못한 분들도 있지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누군가 넘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은 시체라고 단정하고 멀찍이 돌아갔으므로 강도만난사람의 형편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사람은 거의 죽은 것(half death)이라고 했으니, 멀리서 보기에 이미 죽은 것으로 단정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은 시체가 있으면 율법에 의하면 당연히 피해 가야합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겨 다가갔습니다.
다가가서 보니까 강도만난 사람은 시체가 아니라 거의 죽은 사람이며 즉각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돕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그의 필요를 더 자세히 알게 되어 계속적으로 돕게 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강도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갔는가 아닌가의 차이입니다. 즉 만남과 소통의 문제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강도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갔더라면 그냥 피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가까이 가서 무언으로나마 소통(communication)을 하고, 그의 형편과 사정을 알고 나니, 그냥 버려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선한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정공감(compassion)이 생겼을 것이며 철저한 자기희생을 통해서 돕게(commitment) 되었을 것입니다.
“communication - compassion – commitment”       
      (소통)              (동정공감)          (헌신)

우리가 소통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끼리 서로 가까이 가는 것 곧 만남(in person)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다른 소통의 방법이 필요하셨다면 창조주 께서는 우리가 소통하는 모든 인간 과학적인 방법보다 더욱 정교하고 확실한 방법을 창조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찾아오셔서 직접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 어떤 방법보다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소통방법이라고 가르쳐 주신 셈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사람들이 놀랍도록 변화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 몇 가지를 들자면....

- 예수님께서 여리고 라는 동네를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
  생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변화되었습니다. 

- 사마리아성 수가라는 마을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 뵙고 그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 개 되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 바를 모르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비롯
  한 제자들을 친히 찾아 가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 않아서도 천지를 뒤집어지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몸소 만남을 통해서 소통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방문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장년주일학교를 모이고 하는 만남 또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거기에서 우리 서로 소통(communication)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교회를 이룬 식구들로서 의도적으로 서로 가까이 다가가서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더 많이 알게 되고 깊이 이해하게 되며 결국은 서로를 돕고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사역에 함께 동참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인간들 간의 소통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인사“입니다.
인사는 전혀 모르는 사람 간에 소통이 시작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인사의 태도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정도를 나타냅니다.
아브라함이 광야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과 롯이 소돔성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 아브라함은 나그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가장 존중하는 태도로 손님을 맞았습니다.
- 소돔성의 롯도 나그네에게 인사를 하고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불편
  했나봅니다. 우리가 차라리 길에서 자겠다고 합니다. 롯의 태도가 어떠했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에는 밤새 병으로 죽는 사람과 굶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인지, 아침에 인사할 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혹은 “진지잡수셨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소통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인사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shalom”, 헬라어로 “에이레네“ 는 ”평안하십니까?“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고난과 전쟁을 겪으면서 평안할 때가 별로 없어서 그랬다 봅니다.

바울사도 역시 교회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의 말미에 자세한 안부와 아울러 인사의 말을 기록하였습니다.

인사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가장 기본적인 소통(communication)의 입니다. 특별히 주안에서 영원한 가족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수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독교문화 때문인지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지요. Hi, How’re doing? Nice day, isn’t it? 등등.... 그런데 이런 미국 살면서도 한국인들은 미국인들과는 인사를 잘하면서도 한국인들끼리는 인사를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자라는 한국인 가정의 아이들도 대개 인사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적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사람을 귀히 여기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누구를 만나든지 존중하며 인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존중하는 것, 인사하는 것은 자라면서 저절로 터득되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듯이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가정이나, 모임이나, 교회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사람을 맞이하는 자세, 즉 인사하는 자세를 통해서 그들의 인격과 신앙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전혀 모르던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인사를 나무며 시작되는 소통(communication)을 통해서 서로의 형편과 사정을 알게 되고, 더 나아가는 동정공감( compassion)으로 발전하게 되며 결국은 상대방의 필요를 위해서 헌신하게(Commitment) 하게 됩니다. 하물며 주안에서 함께 영원한 천국의 식구 된 우리들이야 더 할 나위 없습니다. 
 
여러분, 홍목사님의 사모님이신 신경아 사모님이 Bloom where you are planted(심기운 곳에서 꽃 피우기)라는 글을 Korea Post 라는 신문에 게재하시는 것을 모두들 아실 것입니다. 그 중에서 지난 주간에 실린 “마음가짐이 먼저냐 행동거지가 먼저냐?”라는 제목의 글이 저의 눈에 띄었습니다. 한국에서 신사모님이 근무하던 학교에서 어떤 아이가 수업시간에 책상을 계속 두드려서 수업에 방해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그 행동만을 멈추케 하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썼다고 합니다. 책상을 치우기도 하고, 아이의 손에 장갑을 끼워도 보고, 등등... 그런데 실은 그 아이의 마음에 불안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 마음 속에 있는 요소가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 안에 있는 불안요소를 해결하면 책상 두드리는 행동은 자연히 멈춰졌을 것이라고 술회하셨습니다.

이 칼럼을 읽으면서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 지방의 광인 생각이 났습니다. 그 사람은 무덤에 거하면서 밤낮 절규하고 자기 몸을 돌로 상하게 하는 미치광이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그를 쇠사슬로 묶어서 발광을 못하게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것은 소통이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발광한 것은 그의 속에 군대귀신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니 그 광인이 곧 온전해 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의 문제를 아시고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사람의 겉모습이나 행동 자체만 보고 판단하고 비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내면을 깊이 알게 되면 모두 다 이해가 되고 또 도리어 동정공감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그리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겉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속에 있는 문제를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심정을 아시고 동참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삭개오를 만나주시고, 사마리아여인을 만나주시고, 문둥병자, 맹인, 38년된 병자, 한편 손 마른 자를 만나주셨습니다. 그 모든 사람과 소통(communication)하셨습니다. 그리고 소통은  곧 동정공감(compassion)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신이 핍박을 당하시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문제에 동참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시며 해결해 주셨습니다.(Commitment)

오늘날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소통(communication)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 사랑하는 관계일수록 안부가 궁금하고 속마음을 더 많이 알고 싶어 합니다. 
- 그래서 대화를 많이 하게 되고 관계성이 더욱 더 가까워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소통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에 우리가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매일 경건의 시간(Quiet Time)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3월 1일부터는 매일성경으로 각자 경건의 시간을 가지고 장년주일학교에서 함께 나눔을 가지며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방법은 매일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그것을 따라하면 됩니다만, 저는 다음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 찬송으로 시작하여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 본문을 몇 번이라도 읽어서 내용자체를 확실히 파악합니다. 
- 그리고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영적인 멧세지를 찾아내야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사랑, 목적을 중심으로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핵심은 예수님이심으로 신구약 모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 그 다음에는 오늘 하루 살아갈 지혜와 삶에 적용할 제목들을 생각해 봅니다.
- 주님께서 하루를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로 마칩니다.   
 
하루 일과에서 짧게는 20분, 30분 내지 한시간정도까지 인격적으로 주님을 대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이시간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속의 지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이와 같이 소통(communication)을 통해서 상대방의 심정을 알게 되면 그 다음 단계로는 동정 공감(compassion)이 생기게 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깊이 소통함으로서 하나님의 심정에 동참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에 기쁨으로 몸을 던저 희생(Commitment)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게 되면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자기 십자가를 감당할 의도와 능력이 생기며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행복합니다. 

선한사마리아인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압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에 가까운 자들인가, 아니면 제사장과 레위인에 더 까가운 자들인가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장면에서 어떤 역할입니까? 
제사장, 레위인, 예수님을 시험한 율법사, 아니면 선한 사마리아인?????
 
여기 강도만난 사람은 영적으로 불 때 구원 받기 전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서 마귀의 유혹을 따라 세상적으로 살다가 몸과 마음이 상한채 버려진채 영원한 멸망의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죽은 목숨, 살았으나 죽은 인생이었지요. 선한사마리아인과 같은 전도자들을 통해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고 거듭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인생길에는 과거 우리의 모습과 같이 마귀에게 유혹당하고 이용당하며 찢기고 할퀴운 채 멸망을 향해 가는 죄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은 거의 죽은 목숨입니다. 오늘 죽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까이에 있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 누구입니까?
그들이 부모이든, 배우자이든, 자녀이든, 친척이든, 친구이든, 동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를 보고 불쌍이 여겨, 가까이 갔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형편과 필요를 잘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34-35절) 철저하게 도와 주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우리들도 죽어가는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의 심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까이 가야하겠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형편과 필요를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필요한 복음을 실제적으로 말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으세요. 예수님을 믿고 천국가세요.”
이런 말로 시작해서 어찌하든지 상대방이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듭나도록 기도하며 헌신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 전도 대상자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고 성장해서 다른 사람을 전도할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지금 이 한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이 나의 필생의 사역이라는 자세로...
저는 사역자로서 이 한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이 나의 목회의 성공이라는 자세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함께 교회를 이룬 동역자들도 서로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형편과 사정과 그 심정을 알고 동참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적인 오해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 받아야할 사람은 누구 누구입니까? 지금 복음을 전하십시오.
* 여러분이 누군가와 소통이 막혀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가까이 가십시오.

우리는 이것을 당연히 해야 할 줄 알면서도 즉시 착수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금 말씀하십니다.

가서, 즉시 이와 같이 하라. 지금 하라. 네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


교회소개 About Church 개인정보취급방침 Privacy Statement 서비스이용약관 Terms of Service Copyright © jiguchonchurch.org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To top

Southern Baptist Convention Arizona Global Baptist Church
536 E. Fillmore St., Tempe, AZ 85288 / T. (48O) 442-7329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Mobile Edition